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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상욱 - 문학평론가, 인천대 일어일문학과 교수
등록날짜 [ 2015년02월09일 17시46분 ]

일본인은 누구인가. 이 난문이 오늘날 학계에서 “‘일본인’을 만들어내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식으로 바뀌게 된 것은, 주지하다시피 바로 이 ‘일본인’이란 것이 하나의 표상(表象, representation)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즉 미셸 푸꼬와 에드워드 사이드 이후 ‘유럽인’과 ‘동양인’, 그리고 ‘일본인’은 다양한 언어형식에서 지도, 사진, 이미지까지를 포함한 다양한 표상 시스템을 통해서 만들진 허구적 산물이라는 인식이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일본인’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그러나 표상은 실효성을 갖는 허구라는 점에서 일반적인 허구와는 다르다. 예컨대 일본열도에 사는 어떤 한 사람이 다양한 표상 시스템 속의 ‘일본인’과 어긋날 때 차별과 폭력에 노출되는 일이 생긴다. 혹은 지역적, 계급적인 차이로 인해 곤란을 겪고 있는 사람이 ‘일본인’이라는 표상에 일치한다는 이유 하나로 구제를 받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표상은 한편으로는 그것을 만들고 유통시키고 소비하는 시스템의 총칭인 근대성과, 다른 한편으로는 그 한계선인 제국과 국민국가 등의 통치기구와 깊은 관련이 있다. 따라서 지난 수년 동안 한국 안팎의 표상연구가 주로 근대성과 국민국가의 형성과 관련되어 전개되어왔고, 이제는 아예 근대, 혹은 국민국가 연구가 표상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은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20세기 동아시아의 국가와 문화의 표상은 근대성과 국민국가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예를 들면 20세기 들어 압도적인 문화적, 정치적 헤게모니를 지니게 된 미국이라는 존재를 빼놓을 수 없다. <일본 표상의 지정학>(이경희 옮김, 2014)은 이런 문제의식을 가진 일본의 영문학자들이 3년 간의 공동연구 성과를 모은 책으로, 오늘날 우리들이 ‘일본’, ‘일본적인 것’, 또는 ‘일본적’으로 간주하는 표상들 중 상당수가 냉전기의 일미관계 또는 환태평양이라고 불리는 지정학적 자장(磁場)에 의해 형성되었음을 환기시킨다.
 

미국의 그림자 안에서 만들어진 ‘일본’
 

예컨대 카와바따 야스나리(川端康成)의 <설국>(1937)은, 전시 ‘덧니에 병 밑바닥 같은 안경을 쓴 야만인’의 일본인 표상을 한국전쟁을 계기로 ‘미국과 함께 방위선을 지키는 우군’으로 만들기 위한 미국의 표상 시스템 변동에 의해 새로운 변모를 가져온 대표적 경우이다. 이는 <설국>이 일본적인 것을, 일본도를 든 사무라이라는 남성적 이미지에서 ‘앳되고 의지할 곳 없는’ 게이샤라는 표상으로 전환시켰다는 의미만이 아니다. <일본 표상의 지정학>의 공저자 오치 히로미(越智博美)가 문제시하는 것은 ‘계급갈등에서 심리적 갈등으로 문학의 시점을 이동시킴’으로써 냉전기 리버럴 정치에 참여하고자 하는 미국의 신비평이, <설국> 속 탈정치 세계로서의 ‘일본’을 세계로 끌어냈다는 점이다.
 

‘일본적인 것’에 스며 있는 미국의 존재는 가장 정치적이며 급진적인 일본을 표상했던 미시마 유끼오(三島由紀夫)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가장 ‘순수한’ 일본어를 모색한 일본 낭만파의 적자이자 행동파 사무라이로 잘 알려져 있는 미시마에게 발견되는 외래어와 영어의 남용, 대중친화적 자세와 무엇보다도 보디빌딩으로 단련된 신체. 공저자 엔도 후히또는 이러한 미시마야말로 ‘일상생활 차원에서 정치적 애지테이션(선동)까지를 일관하는 미국의 긍정과 부정이라는 더블 바인드’에 갇힌 전후 일본작가를 대표하는 존재였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러한 모습은 전후 온건 보수주의자로 분류되었던 후꾸다 쯔네아리(福田恒存)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공저자 히비노 게이(日比野啓)가 지적한, “천황의 전체성을 대신해 미국의 전체성을 용인하면서도 그것이 ‘얄팍한 조개껍데기’이므로 가짜가 아닐까 의심하고, 미국의 전체성으로의 편입을 바라면서도 그것을 상상으로 여길 뿐 현실로 여기지 않는” 후꾸다의 모습은 오늘날 아베 신조오(安倍晋三)가 만들려는 ‘일본’이 어떤 심리적 기반 위에서 형성된 것인지를 추측하게 만든다. 즉, 아베는 이러한 이중 구속에 갇힌 ‘일본’을, 미국의 전체성으로의 편입을 현실화함으로써 ‘진정성’ 있는 ‘일본’으로 바꾸고자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것이 현실화될지는 상당히 의문시되더라도 말이다.
 

외국문학 연구자의 과제
 

물론 일본 표상과 미국과의 관련성은 여러 연구자들에 의해서 이미 제기된 바 있다. 하지만 오늘날 일본에서 이와 관련된 연구의 대부분은 역사학과 사회학에서 전개되고 있을 뿐, 정작 일본의 영문학자, 미국학자들은 20세기 이후 표상 시스템으로서의 미국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의외로 침묵해왔다는 점에서, 영문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집필한 이 책의 의미는 각별하다.
 

예를 들면 히로시마 출신으로 일본 영문학계의 대표적 인물로서 일본예술원 회원이기도 했던, ‘무슨 일에든 절도와 관용과 아취를 중시’한 후꾸하라 린따로오(福原麟太郞)가 히로시마 원폭과 그 참혹한 결과에 대해 언급한 일이 전혀 없다는 사실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공저자 사이또오 하지메(齋藤一)의 질문은 이 책이 표상의 허구성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표상이 내재한 가능성(혹은 책임)에도 눈을 돌리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말할 수 없는 희생자를 대신해 가해자인 미국정부에게 누구보다도 유창한 영어로 이를 대리-표상할 수 있는 영문학자의 히로시마 외면은 ‘일본의 영미문학 연구라는 지(知)의 체계’에 대한 심각한 반성을 촉구할 뿐 아니라, 나아가 동아시아의 외국문학 연구자들이 번역이라는 작업과 그 연구를 통해서 어떤 식으로 표상 시스템에 개입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도록 만든다.
 

새로운 운송수단의 개발로 인해 확대되는 해양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일본 표상을 다룬 이 책의 첫 장과, 점령기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언어의 경계선이 허물어지거나 혹은 이를 전혀 개의치 않는 대중문화 영역 속에서 만들어지는 일본 표상을 다룬 마지막 장을 비교해봤을 때, 100여년 사이에 일본 표상이 얼마나 더 미국적인 표상 시스템에 의존하게 되었는지를 알게 된다. 이는 과거에는 표상할 수 없었던 ‘일본(히로시마)’을 ‘있는 그대로’ 재현한다는 그 자체가 설사 가능하더라도 똑같은 표상체계 속에 있는 한 그 표상의 의미는 여전히 불투명한 상태로 체류될 뿐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이는 비단 일본 영문학자들만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점에서 마음이 무겁다.
 


 
* 본문은 디지털 창비 논평이며,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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