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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날짜 [ 2013년02월27일 11시00분 ]

[뉴스타임24=이기현 기자] 김병지 선수는 한국 축구에서 아주 독특한 존재다.

학력으로 따지면 현재 한국 축구에서 고대와 연대가 협회를 잡고 있는 상황에서 이미 아웃사이더이다.

오늘 이야기에서는 논외이므로 자세한 것은 생략한다.

김병지를 말할 때 거의 대부분 같이 나오는 이름이 ‘이운재’다.

이 두 선수는 거의 동시대에 나타난, 더 이상 한국 축구에서 가장 취약 포지션이 골키퍼라는 말이 사라지게 만든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이전의 한국 축구는 유럽 변방리그에서도 퇴물인 골키퍼가 들어와 약체팀을 우승으로 이끌 정도의 수준이었다.

당시 성남의 수준은 ‘신의손’을 제외한다면 리그 중위권이었다.

그러나 골키퍼 한 선수가 겨우 두 경기에 1실점 수준의 실점으로 경기를 막아주는 상황(당시는 승이 2점, 무가 1점임)에서 팀은 자연스레 수비의 안정을 가져왔고 강팀으로 거듭나게 돼 전무한 리그 3연패의 위업을 달성했다.

외국인 선수 골키퍼 기용제한 등의 악법도 나았으나 공격수의 실력향상과 국내 골키퍼에게 하나의 롤모델을 제시하며 결과적으로 한국축구의 수준을 높여준 것 역시 사실이다.

1994년 미국 월드컵은 한국 골키퍼의 수준을 여과 없이 보여줬다.

특히 독일전 전반은 독일 언론에서 2골을 선물받았다고 표현했을 정도로 난감했다.

그러나 후반은 앞으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도 보여줬다.

당시 독일전 후반 우리 골문을 지킨 선수는 ‘이운재’다.

이후 골키퍼는 골대 앞 최후의 보루라는 개념에서 공격의 시발점이라는 개념이 추가된다. 파라과이의 칠라베르, 덴마크의 슈마이켈 등의 선수는 심심치 않게 골을 넣기도 했다.

김병지의 등장은 또 하나의 공격 옵션으로서의 골키퍼의 진화과정에서 등장한 당대 시대 흐름과 일치하는 선수의 등장과 세계무대에서 골키퍼 역시 한국 축구에서 더 이상 블랙홀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건이다.

1998년 김병지는 첫 번째 불운을 만난다.

프랑스 월드컵 직전 EPL의 한 스카우터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골키퍼인 김병지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 때 김병지는 100미터를 11.5초에 달리는 발을 갖고 있었다.

김병지가 골문을 비우고 나올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이 발이다.

상대팀 최후방에서 공을 골대로 차도 김병지는 공보다 먼저 자기팀 골문에 도착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다는 뜻이다.

1998년 당시 김병지를 보고 싶어했던 EPL의 스카우터는 이적료로 한화 20억원, 아쉬움에 뻥튀기 된 가격으로는 40억원 가량의 실탄을 준비했다고 전해진다.

김병지의 불운은 이 스카우터가 마지막으로 기량을 확인하고자했던 두 경기가 멕시코전과 네덜란드전이었다는 것이다.

이길 수 있었던 멕시코전의 역전패 때문에 이 스카우터는 김병지의 기량을 한 번 더 보기로 했고 수비진이 완전히 붕괴된 네덜란드전이 그것이다.

1998년 당시 한국 축구는 월드컵 출전국 중에 두 번째로 빠른 팀이었다.

가장 아쉬운 것은 네덜란드가 가장 빠른 팀이고, 선수 전원이 세계 최고 수준의 기량을 갖고, 대부분이 선수 경력 중 최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당시나 지금이나 한국 축구를 상징하는 것은 강팀과 맞서 포기하지 않는 근성이고 다른 팀보다 또 하나 내세울 것은 빠름이었다.

네덜란드는 1998년에 한국 축구에게는 최악의 상대였다.

역사에서 가정이라는 것처럼 의미 없는 것은 없지만 하다 못해 월드컵 조별리그에서 네덜란드가 아닌 프랑스와 만났더라도 어쩌면 EPL 진출 한국선수 1호는 훨씬 일찍, 그것도 공격수가 아닌 선수를 볼 수 있었을 것이다.

1998년 이후 맨붕 상태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한국 축구는 월드컵 역사상 새로운 실험을 한다.

FC 코리아 프로젝트.

여기서도 비교적 맨붕에서 빨리 벗어난 김병지는 FC 코리아의 주전 골키퍼로 자리메김을 한다.

김병지의 두 번째 불운이 찾아왔다.

이른바 드리블 사건이다.

대부분은 김병지의 튀고 싶어하는 성격이 부른 실수로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당시 김병지의 몸은 만신창이었다. 병원에 누워 있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킥을 하려고 하다가 왼쪽 무릎부상 때문에 차지를 못하고 공을 끌고 나오게 된 것이다.

이는 김병지에게 세계에서 빠른 골키퍼의 자리만 앗아가지 않고 2002년, 한국 축구 역사상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에 주연 자리까지 뺏어갔다.

더 이상 국가대표 축구팀에 김병지의 자리는 없다.

1년에 국가대표 축구팀이 경기 하는 날만 전문가가 되는 팬이나 4년에 한 달만 붉은악마가 되는 사람에게는 아직도 김병지가 골키퍼를 보고 있다면 “언제적 김병지인데? 그만 후배에게 물려주지”란 반응이 많다.

이런 사람들에게 원정경기에서 무수한 선방으로 홈팀의 X줄을 타게 하고, 홈팀 서포터들에게 제발 한골만 먹어주라는 말을 쌍욕과 함께 들으면서도 빙그레 웃으며 윙크와 함께 서포터즈석에 엄지를 치켜세우는 그의 모습은 생소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실력으로 국가대표 골키퍼를 뽑는다면 아직도 김병지의 이름은 첫 손가락에 꼽고자 한다.

그 어떤 후배도 아직 최소한 K리그에서는 그를 넘어선 실력을 갖춘 골키퍼는 없다고 단언한다.

물론 개인적인 호불호가 상당히 작용하는 평가기는 하지만...

1970년 생인 김병지는 가까이서 보면 조금 큰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다.

김병지는 술 담배를 전혀 하지 않고 물만 먹어도 살이 찐다는 어떤 선수가 고기집에서 살이 찌지 않도록 ‘아주 조금만’ 먹는 양과 비교해 거의 굶는 수준으로 먹는다.

비록 골키퍼의 수명이 필드플레이어에 비해 길다고 하지만 아직도 후배들이 그를 뛰어넘지 못했다는 것은 끊임없는 자기절제와 피나는 노력이 뒤에 숨어 있다.

별 일 없다면 그라운드에서 2년간 김병지를 더 볼 수 있다.

이 기간이 지나 또 경기를 뛸 수 있는 상황이 된다면 K리그에서는 사실상 깨기 힘든 기록이 기다리고 있다.

이미 전설이 되버린 김병지여, 신이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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